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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레전드] 런던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 홍명보, "선배들의 한을 풀겠다는 각오로 하나로 뭉친 훌륭한 후배들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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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201회 작성일 18-10-2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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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이루지 못한 대업

지난번 런던올림픽 축구 3~4위전에서 한국이 일본을 2-0으로 꺾고 올림픽 출전 64년 만에 처음으로 동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보면서 필자에게는 감격스럽다거나 기쁘다는 느낌보다는 왠지 '세월의 무상함'이란 어휘가 먼저 떠올랐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축구 대표팀을 이끈 홍명보 감독에 대한 필자의 개인적인 소회(所懷)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 개인적인 소회란 22년 전인 1990년 5월20일, 이탈리아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김포공항을 떠나면서 로비에서 기념촬영을 할 때의 기억에서 비롯된다.

이회택 감독을 비롯한 코칭스태프와 24명의 엔트리 가운데 막내였던 홍명보가 기라성 같은 대선배들 사이에 끼어 어색한 표정으로 카메라의 조명을 받는 앳된 모습이 현재까지도 필자의 머리 속에 제법 선명하게 각인돼 있는 탓이다.

하기야 '올챙이' 시절을 거치지 않고는 '개구리'가 될 수 없는 것이 자연의 이치일테니 홍명보가 한국의 수많은 축구 선수들 가운데 유일하게 월드컵 4회 출전이라는 관록을 쌓으며 오늘에 이른 것 역시 지극히 당연한 이치요 수순이라고도 여겨진다.

그러고 보니 홍명보만큼 큰 일을 해낸 축구인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나오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든다.

선수로는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한국대표팀의 주장으로 기적과도 같은 4강 진입의 견인차가 됐고 지도자로는 서두에서도 언급한 바 런던올림픽 동메달의 숨은 주역이 됐으니 말이다.

이 같은 어마어마한 두 가지 일을 해낸 선배가 일찍이 있었으며 앞으로 해낼 후배는 또 있을 것인가.

물론 제2, 제3의 홍명보가 계속 나와야 하겠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소리다.

한국축구 신세대 리더의 선두주자 홍명보(43).

런던올림픽이 끝난 뒤 '올림픽 축구대표팀'이 해산돼 엄밀히 말해 현재는 '전(前) 올림픽 대표팀 감독'의 신분인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주말 그의 매니지먼트 회사인 서울 역삼동 소재 '팀 트웰브(Team Twelve)'를 찾아갔다.

▲선수들과 새로운 역사 만들어보자 다짐

먼저 올림픽 대표팀을 맞게 된 경위부터 알아보자.

"제가 3년 전인 2009년 11월 이집트에서 열린 20세 이하(U-20) 월드컵 때 감독을 맡았거든요. 그때 8강에 올랐지요. 대회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이 대표팀이 자연스레 올림픽팀으로 전환돼 저 역시 자연스럽게 지휘봉을 계속 잡게 된 겁니다."

진부한 질문인줄 알면서도 동메달을 땄을 때의 소감을 묻지 않을 수 없다.

"기쁘고 즐거운 거야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아울러 짧은 기간이지만 고된 훈련을 잘 이기고 따라준 후배 선수들이 너무 고마웠습니다. 국내에서 성원을 해주신 국민 여러분들과 런던까지 찾아와 열광적으로 응원을 보내주신 팬 여러분들도 감사했고요."

훈련은 어떤 방식으로 했을까.

"잘 아시겠지만 올림픽대표팀 선수 가운데는 해외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이 많지 않습니까. 그렇다 보니 그 선수들을 한꺼번에 다 모으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정식으로 훈련을 시작한 게 7월2일이었습니다."

런던으로 출발한 게 7월15일이었으니 합숙훈련 기간이 겨우 13일 밖에 안 된다는 얘긴데.

"그렇긴 한데요. 다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니까요. 합숙훈련을 오래 하지 않았어도 호흡이 잘 맞더라고요. 제가 주문하는 사항도 잘 따라주었고요. 또 외국팀과 두 차례 평가전을 치른 것도 팀워크를 다지는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홍명보가 이끄는 올림픽 대표팀은 뉴질랜드와의 1차 평가전에서 2-1, 세네갈과의 2차 평가전에서는 3-0으로 완승했다.

런던 현지에 도착해서는 선수들에게 어떤 점을 주로 강조했을까.

"사실 구체적인 전술같은 것은 새삼스럽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않았고요. 주로 정신적인 면을 강조했는데요. 한국축구가 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지 64년이나 되지 않았느냐, 선배님들이 못 이루신 한을 우리가 풀어서 새로운 역사를 한번 만들어보자. 뭐 이런 식으로 후배들의 사기를 북돋웠습니다."

간략하게 올림픽 경기 전적을 되돌아보면 B조 예선 1차전인 멕시코전은 0-0 무승부, 2차전 스위스전은 2-1승, 가봉과의 3차전은 0-0 무승부, 영국과의 8강전은 1-1 무승부 뒤 승부차기 승, 브라질과의 준결승은 0-3패, 그리고 일본과의 3~4위전에서 2-0 승리.

이중 가장 힘든 경기는 어느 경기였을까.

"아무래도 가봉과의 3차전이었다고 말씀드려야겠네요. 경기결과에 따라서 8강 진출 여부가 유동적이었으니까요. 선수들도 많이 긴장했고요. 찬스도 많았지만 실점위기도 몇 번 있었지 않습니까. 지금 생각하면 이 가봉전이 제일 큰 고비였던 것 같습니다."

동메달을 다툰 일본과의 경기는 오히려 편하게 맞이했다는 말인데.

"그렇습니다. 저희들이 의도한대로 된 셈이었거든요. 일본하고 맞붙으면 우리 선수들이 우선 정신력에서 이기도 들어가니까요. 예선전 3경기나 8강전, 4강전보다 오히려 쉽게 경기를 풀어나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박종우 문제'는 잘 해결되길 바랄 뿐

이 시점이 되고 보니 묻지 않을 수 없는 말이 생긴다. '박종우 독도 해프닝'.

"저는 그걸 보지 못했어요. 경기가 끝나자마자 기자회견 준비도 해야 하고 해서 라커룸에 와 있었거든요. 그 친구가 그런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안 것은 한참 뒤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큰 문제로 확대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그 다음날 멕시코와 브라질의 결승전이 끝난 다음에 진행된 시상식에 메달을 받으러 가는 버스 안에서 알았습니다."

감독의 입장에서 선수의 그 같은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 친구가 무슨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런 행동을 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이도 어린 데다가 동메달을 땄으니 기분도 좋았을 테고….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그런 행동이 나왔겠지요. 또 문제가 된 그 플래카드도 자기가 미리 준비한 것도 아니고 어떤 관중한테서 건네받은 거라면서요. 잘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지요, 뭐."

이 문제와 관련해 대한축구협회가 일본축구협회에 사과성 이메일을 보낸 것에 대한 생각은.

"전 사실 그런 이메일을 보냈다는 사실도 모르고 그냥 얘기만 들은 거지만…. 축구협회에 계신 분들이 이 문제를 그냥 잘 해결해 보려고 그런 것 아니겠어요. 꼭 뭐 사과를 하려고 했거나,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올림픽이 끝난 뒤에 일본에 다녀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 물었다.

"이번 런던올림픽에 나간 선수들 중에 일본 프로팀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이 몇 명 있지 않습니까. 그 선수들을 한국 대표팀에 합류하도록 협조해준 각 소속팀에 감사 인사를 하고 겸사겸사 일본축구계도 둘러보기 위해 10월말부터 한 열흘 동안 다녀왔습니다."

올림픽 대표팀 엔트리 18명 가운데 일본 프로리그에 진출해 있는 선수는 수비수 김영권(오미야), 장현수(FC 도쿄), 황석호(히로시마), 미드필더 김보경(세레소 오사카), 한국영(쇼난 벨마레), 백성동(주빌로 이와타) 등 6명이다.

▲10년 전 한일월드컵 4강 진출, 어제 일처럼 생생해

서두에서도 설명했듯이 홍명보에게는 런던올림픽 동메달 말고도 또 하나의 위업이 있다.

10년 전인 2002년 한일월드컵 4강 진입에 주역을 맡았던 일 말이다.

그때 그는 주장의 중책에다 공격수 황선홍과 함께 팀내 최고참으로 후배들을 이끌었다.

"이번 런던올림픽처럼 성적에 책임을 져야 하는 감독의 입장은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부담은 오히려 더 크지 않았나 싶습니다. 주장인데다가 홈 그라운드니까 국민들께 좋은 경기를 보여드려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경기를 되돌아보면 어떤 느낌이 드는지 궁금하다.

"예선 1차전 폴란드와의 경기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그때 우리 선수들은 4강 진입보다는 어떻게든 월드컵에서의 첫 승리를 거두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고 있었거든요. 다행히 (황)선홍이하고 (유)상철이가 한 골씩을 터뜨려서 쉽게 이겼지요."

월드컵에서의 첫 승리라는 당면의 지상과제를 달성하고 나니 심적 부담이 훨씬 줄어들어 이후의 예선 두 경기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을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6월22일 스페인과의 8강전은 홍명보 개인은 물론 100년 한국축구사로 범위를 넓혀 생각해도 역사적인 분수령이었음에 틀림없을 듯하다.

승부차기 4-3으로 앞선 상황에서 다섯 번째 키커로 나선 홍명보가 실축을 했다면?

그리고 이어 등장한 스페인의 다섯 번째 키커가 킥을 성공시켜 4-4가 됐다면?

당시 한일월드컵의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궤도를 틀었을지 모를 일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했으니 부질없는 생각이긴 하지만 한번쯤 상정해볼 수는 있는 문제가 아닌가.

"저 하나를 두고 그렇게 엄청난 의미를 부여해 주시니 감사하긴 한데요. 사실 그때 저는 아무 부담 갖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볼을 찾습니다. 우리가 4-3으로 앞서 있었으니까 제가 실축을 해도 바로 지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거든요."

어쨌거나 홍명보의 오른발을 떠난 볼이 스페인 골키퍼의 다이빙 사정권을 훨씬 벗어나 왼쪽 네트 상단에 꽂히는 장면은 지금도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TV 판매점의 진열대에 놓여 있는 수 많은 화면들을 통해 흔히 볼 수 있는 '추억의 '명장면'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확인해야 할 사항이 있다.

홍명보가 당시 대표팀 1차 명단에서 제외된 것을 두고 나돌았던 소문 말이다.

소문의 내용은 홍명보가 히딩크 감독의 눈 밖에 벗어나 대표팀에서 탈락했다는 것.

"저도 그런 소문이 있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요. 터무니없는 얘기에요. 그런 소문이 난 것 아마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그 전해인 2001년 말에 제가 정강이 부위를 다쳐서 한동안 잘 뛰지 못할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대표팀에서 일시적으로 제외됐던 건데 그걸 두고 사람들이 이러구 저러구 말들을 옮기니까 그런 소문이 난 게 아닌가 싶은데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한 축구

홍명보가 '볼'을 차기 시작한 것은 서울 광장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8년.

공부 열심히 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부모님의 반대 속에서도 워낙 축구를 좋아해 볼에 매달린 것이 오늘날 '훌륭한 사람'보다 더 '위대한 축구지도자'로 대성하게 된 계기였다.

광희중과 동북고를 거쳐 고려대에 입학한 1987년 이후에는 미드필더로서의 기량이 한층 원숙해져 고려대가 전국대학 대회를 모조리 휩쓰는 명문 팀으로 거듭나는데 단단히 일익을 맡았다.

대표선수로 선발된 90년, 이탈리아 월드컵을 시작으로 94년 미국, 98년 프랑스, 그리고 2002년 한일월드컵에 이르기까지 한국선수로는 유일하게 4회 연속 월드컵에 출전하는 과정에서 달성한 A매치 출전 128게임의 기록 역시 국내 최고다.

"제가 꼭 축구를 남들보다 잘 해서 이런 기록을 세웠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큰 부상이 없었고 또 여러 선생님들이 제 기량을 인정해 주셔서 줄곧 대표팀에 발탁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든 분들께 감사해야겠지요."

게임을 잘 하는 것 못지않게 부상을 입지 않는 것도 실력이 아닐까.

게다가 그가 지도자들을 찾아다니면서 무슨 '로비'를 한 것도 아닐 텐데 무려 12년 동안이나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 수 있었던 것은 남들이 따를 수 없는 그 만의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태극마크를 단 대표선수가 아니라 프로선수로서의 커리어 또한 '화려함' 그 자체다.

1992년부터 96년까지는 포항제철, 97년부터 5년간은 일본의 쇼난 벨마레와 가시와 앤틀러스, 그리고 2003년부터 2년 동안은 미국으로 진출해 LA 갤럭시에서 게임을 풀어가는 게임메이커로 명성을 떨쳤는데 이 과정에서 데뷔 연도인 92년에는 포항제철의 우승과 함께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안았고 99년에는 가시와 앤틀러스의 일본 J-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2004년 현역 은퇴 이후 지도자가 된 이후로는 2005년 딕 아드보카트 대표팀 감독 밑에서 코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2007년부터 2년 간은 23세 이하(U-23) 대표팀 코치로 지도자 수업을 쌓은 뒤 2009년부터는 20세 이하(U-20) 대표팀 감독으로 대표선수들을 조련해 왔다.

▲홍명보 장학재단에 전념하고 싶어

서두에서도 설명한 바 런던올림픽이 끝난 뒤 올림픽 대표팀이 해체돼 현재 홍명보는 지도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는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으며 장래 희망은 무었일까.

"알고 계시겠지만 제가 10년 전에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제 이름을 따서 홍명보 장학재단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그 일만 해도 엄청나게 분주합니다. 거기다가 연말에는 장학재단 주최로 자선축구 게임까지 하거든요. 대표팀 맡고 있을 때보다 일이 더 많아진 것 같네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홍명보 장학재단은 출범 이후 올해까지 매년 30명의 축구장학생을 선발해 1인당 100만원씩의 장학금을 지급해 오고 있는데 남자 선수 가운데는 아직 대표선수를 배출하지 못했지만 여자 선수 중에는 여민지와 지소현 등 2명의 대표선수를 탄생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자선 축구게임은 역시 장학재단이 출범하던 해부터 청소년들에게 꿈을 심어주기 위해 국가대표급 선수들을 두 팀으로 나눠 시범경기를 벌이는 것을 말하는데 3년 전부터는 '꿈을 나누자'는 의미의 영어단어를 활용해 'Share the Dream'이라는 명칭으로 대회의 이름을 변경했다는 설명이다.

"많은 분들이 다시 대표팀을 맡거나 프로팀 감독으로 방향을 바꿔보는 게 어떠냐고 말씀들을 하시는데 지금 생각 같아서는 어떤 팀도 맡지 않고 오로지 장학재단 일과 자선 축구게임 개최의 두 가지 일에만 전념하고 몰두하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지금 올림픽 대표팀이 존속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프로팀에서 영입 제의가 들어온 것도 아니니 후배 꿈나무들을 키우고 많은 사람들과 꿈을 나누는 것이 근본 취지인 자선게임 사업에만 모든 힘을 기울이겠다는 얘기다.


스포츠한국 김석현기자 / 2012. 11. 1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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