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초 20세 이하 축구대표팀의 감독과 선수로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어색해했다. 홍명보(43) 감독은 구자철(23·아우크스부르크)을 보며 ‘저 친구보다는 수비수 홍정호가 주장으로 더 잘 어울린다’고 판단했다. 제자는 스승에 대해 ‘소문대로 참 무뚝뚝한 지도자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오래지 않아 서로 호감을 느꼈다. 스승은 제자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며 팀의 구심점 역할을 맡겼다. 제자는 ‘팀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다짐으로 화답했다. 20세 이하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2009)과 광저우 아시안게임(2010), 런던올림픽(2012) 등 굵직한 국제대회를 치르는 동안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더욱 단단해졌다. 그리고 런던올림픽 동메달을 합작해냈다.
지난 27일 밤 서울 송파구 K-아트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연말에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느라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이라면서도 “올해가 가기 전에 한번쯤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구자철은 급성 장염으로 링거를 맞는 등 고생하면서도 스승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인터뷰를 강행하는 투혼을 보여줬다.
◆런던의 기적, 정신력과 시스템의 합작품
런던올림픽을 첫 화두로 대화의 문이 열렸다. 홍 감독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비결을 정신적인 면에서 찾았다. “우리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던 비결은 세 가지다. 모두가 팀을 위해 희생했고, 각자 자신이 맡은 역할을 120% 수행했고, 어떤 상황에서도 ‘메달권 진입’이라는 목표의식에 흔들림이 없었다”고 홍 감독은 말했다.
구자철은 ‘시스템’을 이야기했다. “런던올림픽은 어느 대회보다도 선수단에 대한 축구협회의 지원이 체계적이었다”고 언급한 그는 “코칭스태프가 다양한 연구를 통해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을 제시한 점, 동일한 멤버들이 4년간 발을 맞추며 국제대회 경험을 쌓은 점, 와일드카드 멤버들이 기존 선수단에 자연스럽게 섞인 점 등도 좋았다”고 말했다.
말을 이어받은 홍 감독은 “우리가 만든 노하우가 향후 국제대회 출전을 준비하는 각급 대표팀에 가이드라인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덧붙였다.
◆“감독님은 2012년의 영웅”, “계사년을 너의 해로”
‘올 한 해 스승의 활약상에 대해 평점을 매겨달라’는 부탁에 대해 구자철은 “선생님께 점수를 매기는 건 제자의 도리가 아닌 것 같다”면서도 “만약 ‘나만의 시상식’이 열린다면 홍 감독님께 ‘올해의 감독상’을 드릴 것이다. 감독님은 2012년 한국축구 최고의 영웅이었다”는 말로 스승을 높였다.
이어 “2년 전 남아공월드컵 개막을 열흘 앞두고 본선 엔트리에서 탈락해 실의에 빠져 있을 무렵, 감독님께서 전화를 걸어 ‘넌 우리나라 최고가 될 수 있다. 한 번의 실패로 좌절하지 말라’고 격려해주셨다. 그 전화 한 통이 내 축구인생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며 감사의 뜻도 전했다.
홍 감독은 구자철에 대해 8.5점(10점 만점)을 줬다. “자철이는 내가 기대한 리더 역할에 모자람이 없는 선수였다”고 언급한 그는 “1.5점을 뺀 이유는 책임감이 지나쳐 스스로 너무 많은 것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체력에 대한 걱정 때문에 컨트롤을 좀 해주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아름다운 역전승을 위해
홍 감독은 자신의 인생을 축구경기로 비유해 달라는 부탁에 대해 “우세한 흐름을 유지하면서 전반을 0-0으로 마쳤다”고 했다. 이어 “지금은 하프타임이다. 후반에 골을 넣기 위해 다양한 전술과 전략을 구상 중”이라고 설명했다. 구자철은 “현재 전반 40분에 0-1로 지고 있지만, 최소한 동점으로 전반을 마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구자철은 “홍 감독님께서 히딩크 감독이 이끄는 러시아 클럽 안지에서 코치 생활을 하실 거란 이야기를 들었다. 스스로를 낮추고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면서 ‘감독님답다’는 생각을 했다”며 웃었다. 홍 감독은 “자철이는 힘든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이겨내며 한 단계씩 올라서고 있다”면서 “계사년 한 해를 ‘빅클럽 이적’ 등 더 큰 꿈에 한 발짝 다가가는 기회로 삼기 바란다”고 덕담했다.
중앙일보 송지훈·박린 기자 / 2012. 12. 31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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