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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뭐하세요①] 홍명보 “기회가 있을 때 공부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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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677회 작성일 18-10-19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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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가 있을 때 공부해야죠. 제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스승이 되려면요."

홍명보(42) 올림픽축구대표팀 감독은 요즘 '열공 모드'에 빠졌다. 지난달 27일부터 이달 6일까지 파주대표팀트레이닝센터에서 열린 아시아축구연맹(AFC) 프로 지도자 자격증(이하 P급 지도자 라이선스) 3차 교육을 수강했다.

2012 런던올림픽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치르느라 최근까지도 무척 바빴지만, 숨 돌릴 틈도 없이 두꺼운 축구이론 서적을 펼쳐들었다. 빡빡한 교육 일정 중 잠시 짬을 내 인터뷰에 응한 홍 감독은 "이제껏 현장에서 체득한 여러가지 지식들을 이론적으로 다질 수 있는 기회가 됐다"며 수강 내용에 대해 만족해했다.

이어 "앞으로 이뤄야 할 꿈을 위해, 그리고 나와 함께 할 제자들을 위해 어떤 방식으로든 공부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다짐도 들려줬다. '라이선스 취득을 확신하느냐'는 질문에는

"마지막 과정인 논문 심사 당시 강사의 눈빛이 부드러웠다"며 농담을 섞어 긍정적인 기대감을 나타냈다. 홍 감독의 '열공' 결과는 AFC측의 정밀 심사를 거쳐 6개월 후 쯤 공개된다.

<어제>

◇ 아는 만큼 누릴 수 있다

홍명보 감독이 '아는 것'의 중요성을 절감한 건 미국월드컵이 열린 1994년이다. 당시 25살의 중앙수비수 홍명보는 한국축구대표팀 멤버들 중 가장 주목받는 선수였다.

'전차군단' 독일과 치른 본선 조별리그 경기에서 상대 공격수들을 꽁꽁 묶으며 골까지 넣는 모습을 본 유럽 스카우트들은 '등번호 20번 홍'에 강한 관심을 보였다.

대회를 마친 뒤 독일 분데스리가 클럽 두 팀과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클럽 한 팀이 홍 감독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다. 그 중 독일 명문 슈투트가르트가 가장 적극적이었다.

-결과적으로 유럽 진출에 실패했는데.

"1990년대 초만 해도 한국축구에 '해외 이적'이라는 용어는 생소했다. 어떻게 해야 한국 선수가 유럽 무대에 나갈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에이전트 제도도 활성화 되지 않은 시기였다."

-협상은 어떻게 이뤄졌나.

"협상이랄 것이 없었다. 당시 소속팀 포항도 유럽 구단과 어떻게 밀고당기기를 해야할 지 전혀 모르더라. '이 만큼은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언론이 제시한 금액을 가감 없이 유럽 구단들에게 전달했다. 당시 아시아 선수들의 시장가치와 견줘 터무니 없이 높은 금액이었다. 이적 논의를 제대로 시작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논의가 중단됐다."

-아쉬움이 많이 남을 것 같다.

"물론이다. 하지만 딱 그 정도가 당시 한국축구의 수준이었다. 몰라도 너무 몰랐다.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다면 꼭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세계축구의 흐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전성기에 유럽 무대도 밟아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홍명보 감독은 유럽 진출의 기회를 놓친 지 3년 만인 1997년에 벨마레 히라츠카(일본)로 이적하며 해외 진출의 꿈을 이뤘다.

<오늘>

◇ 실패하더라도 배우고 싶다

P급 지도자 라이선스는 지도자 자격증 중 최상위 단계다. 그만큼 취득하는 과정도 까다롭다. 이번에 홍명보 감독과 함께 교육을 받은 지도자들은 지난해 12월, 올해 9월, 그리고 이번까지 총 3차례의 심화 학습을 거쳤다.

일정도 무척 빡빡했다. 시간을 허투루 낭비할 틈이 없었다. 홍 감독은 "교육과정 내내 아침 일찍부터 밤 늦게까지 강의와 실습을 반복했다. 함께 강의를 듣는 지도자들 앞에서 발표수업을 여러 차례 진행했고 논문도 냈다. 시험도 치렀고 숙제도 많았다"며 "갑작스럽게 공부에 몰두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다. 잠과 휴식 시간을 줄여가며 공부에 매달렸다"고 털어놓았다.

-P 라이선스에 도전장을 낸 건 향후 프로팀을 이끌기 위해서인가.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겠다.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다. 이론을 철저히 다져놓으면 젊은 지도자로서 겪을 수 있는 여러가지 시행 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컸다."

-지난해 광저우 아시안게임 직후 P급 라이선스 교육을 시작했다고 들었다.

"아시안게임은 빛과 그림자를 모두 체험한 대회였다. 당시 나는 주변의 우려를 무릅쓰고 21세 이하 어린 선수들 데리고 경기를 치렀다. 2012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우리 선수들에게 국제대회 경험을 쌓아주기 위한 의도였다. 돌이켜 보면 당시의 주축 선수들이 A대표팀에도 여러 명 발탁되는 등 눈에 띄게 성장했으니 꽤 효과를 본 것 같다. 하지만 금메달을 따지 못한 건 나로서도 몹시 안타까웠다. 동메달에 그친 아쉬움을 공부로 푼 셈이다."

-지도자 역할 뿐만 아니라 자선축구경기 주최, 국제연합(UN)에이즈 친선대사 선임 등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데.

"다양한 역할을 두루 경험하는 건 폭넓은 배움을 얻기 위해서다. 간혹 '우리나라에 유명한 축구스타들이 많은데 왜 자선의 총대를 혼자 메려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여러가지 활동들은 총대를 메는 개념이 아니다. 내가 LA갤럭시(미국)에서 뛸 때 자연스럽게 보고 배운 것들을 실천하는 것 뿐이다. 그 속에서도 배울 것들이 많이 있다."

홍명보 감독은 7일 축구선수들의 사회봉사 모임인 '추캥' 멤버들과 함께 강원도 철원을 방문해 6사단 장병들을 위문할 예정이다. 봉사활동 이력이 또 하나 추가됐다.

"그녀석(추캥 멤버들)이 하도 같이 하자고 졸라대 어쩔 수 없었다"며 미소지은 그는 "어린 선수들이 나눔의 즐거움을 일찌감치 깨달았다는 사실이 대견하고 기특하다. 앞으로도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내일>

◇ 나의 길, 두려움 없이 간다

지금 홍명보 감독의 가장 큰 관심사는 2012년 런던올림픽 본선 진출이다. 2009년 20세 대표팀 감독직을 수락한 이후 변함 없이 꾸는 꿈이기도 하다. "선수 시절에 2002월드컵 16강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면, 지도자로서 지금 내 눈은 런던에 고정돼 있다"는 것이 홍 감독의 의욕 넘치는 설명이다.

-본선행에 성공할 경우 올림픽팀은 어떻게 꾸릴 생각인가.

"대대적으로 손질을 가할 예정이다. '올스타급' 멤버를 꾸려 메달권에 도전해보고 싶다. 한 가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은 내가 쓰는 '올스타'라는 단어는 이름값과 경력, 인기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 팀에 가장 필요하도 도움이 되는 선수가 나에겐 올스타다."

-홍명보팀의 색깔을 설명한다면

"이제껏 올림픽팀은 '희생'과 '조합'이라는 두 기둥을 중심축으로 삼아 운영됐다. 어떤 선수가 들어오더라도 전술적으로 단단한 색깔을 낼 수 있는 팀을 만들고 싶다. 그러자면 동료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선수들이 우대받는 분위기가 확립되어야 한다."

올림픽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일정을 모두 마친 이후 홍 감독은 새로운 도전에 나설 계획이다. 올림픽팀을 이끌며 배운 것들이 새로운 이정표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

딱히 길을 정해놓진 않았다. 국내·외 클럽팀을 이끌 수도 있고 다른 연령대의 대표팀을 이끌 수도 있다. 현역 은퇴 당시 마음먹었던 대로 축구행정가로의 변신을 꿈꿀 수도 있다.

홍 감독은 "중요한 건 어떤 역할을 맡느냐가 아니라 내가 그 역할에 얼마나 어울리는지의 여부"라면서 "내 능력을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가급적 많이 배우고 경험해야한다"고 했다.

이어 "중요한 결정의 순간에 가족들의 의견을 최우선적으로 반영한다는 것 이외에 정해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면서 "나는 젊다. 해볼 것도 많다. 속도를 높이고 싶은 생각도 없다. 두려움 없이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일간스포츠 송지훈 기자  / 2011. 12. 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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