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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로] 홍명보가 책을 읽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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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4,593회 작성일 18-10-18 1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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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올림픽 축구대표팀 감독은 현역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는 선수로 소문났다. 지난 광복절 날 강원도 인제공설운동장에서 '홍명보 장학재단컵 유소년 축구대회'가 열렸다. 대회가 끝난 후 그는 어린이 선수들에게 축구공이나 운동복이 아니라 책을 한 권씩 선물했다. 기자가 "왜 책이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운동선수는 아무리 잘해도 30대 중반이면 은퇴합니다. 그 후의 인생을 잘 살려면 지식·교양·외국어가 필요하고, 그러려면 책이 제일 좋지요."

여자복싱 세계챔피언 김주희를 키운 권투체육관장 정문호씨도 홍명보와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그는 복싱을 배우러 온 김주희에게 책 열심히 읽고, 학교 성적표 꼭 가져오고, 성적 떨어지면 체육관에 나오지 말라는 세 가지를 요구했다. 이유는 이랬다. "못 배운 선수의 말로(末路)는 비참하니까요. 한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복서라는 아무개는 지금 해결사 노릇 하고 있어요."

홍 감독과 정 관장의 말은 미사여구(美辭麗句) 없이 사안의 정곡을 찌른다. 우리나라에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수업을 팽개치고 운동만 하는 학생선수들이 초·중·고·대학교를 합쳐 11만명쯤 있다. 이들 중 단계 단계를 잘 거쳐 프로선수로 성공하거나 괜찮은 스포츠 지도자 자리까지 오르는 선수는 극소수다. 99%는 도중에 진로를 바꾸거나 그저 그런 선수로 뛰다 뾰족한 대책 없이 스포츠계를 떠난다. 프로 스포츠 천국인 미국에서도 고교 대표로 농구를 한 학생이 대학을 거쳐 NBA 프로팀에 진출할 확률은 1만명에 3명, 0.03%에 불과하다. 미식축구(NFL)는 0.08%, 야구(메이저리그)는 0.45%다. 운동선수도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는 거창한 데 있는 게 아니라 바로 먹고사는 문제에 있다.

학교와 교육당국은 학생선수들에게 현실을 냉정하게 주지시키고 강제로라도 공부를 시킬 의무가 있다. 중도탈락하거나 은퇴할 경우 새 인생을 살려면 그 단계에 필요한 진학·취업·생활지식이 필요하다. 그러나 대다수 학교경영자와 감독·코치들은 대회에서 이기는 것 말고는 관심이 없다. 교육과학기술부 조사를 보면 중학생 선수의 75%, 고등학생 선수의 97.8%가 교과성적이 하위 20%에 속해 있다. 이들은 대학 체육특기생이나 프로팀 선발에 탈락하는 순간 갈 곳이 없어진다. 학교가 자기 이득만을 위해 학생들을 운동기계로 내몰고 인생을 망치게 하는 것을 선진국에선 점잖게 '제도적 부패'(systematic corruption)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미국에선 105년 전인 1906년에 전미대학체육협회(NCAA)가 발족해 학생선수들의 '학습권'을 보호하기 위한 고민을 해오고 있다. NCAA는 고교 4년간 16개 필수과목을 이수하지 않은 선수는 대학선수 등록자격을 주지 않고, 대학 재학 중 평점이 2.0 미만으로 떨어진 선수는 정규대회는 물론 연습경기 출전마저 금지시킨다. 최근에는 대학이 특기생을 받을 때 일정 수준 이상의 수능(SAT) 성적과 고교 학과목 성적(GPA)을 의무 반영토록 하겠다는 한층 강력한 방침을 발표했다.

우리는 작년 7월에야 NCAA를 벤치마킹한 한국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KUSF· 회장 김한중 연세대 총장)가 생겼다. 1년 된 기구가 우리 학원 스포츠의 고질병을 단기간에 고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꼭 해야 할 일이다. 기발한 처방을 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득권과 관행을 부수는 용기와 추진력이다. 

조선일보 김형기 논설위원 / 2011. 08. 22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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