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의 기다림이 끝났다. 내일이면 남아공월드컵에 출전한 후배들이 그리스와 첫 경기를 치른다. 원정 월드컵 첫 16강 진출을 향한 최대 승부처이다. 12일 오후 8시 30분(한국시각) 경기 시작을 기다리는 나 또한 설렘과 긴장감이 느껴진다.
국가대표팀 코치였던 2007년 2월, 영국 런던에서 열린 그리스와의 평가전 기억이 생생하다. 프리미어리그 풀햄의 홈구장이었다. 경기장에서 만난 그리스 선수들의 체격은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그들은 2004년 유럽선수권(유로 2004) 챔피언이라는 자부심으로 플레이에 거침이 없었다.
후반전에 터진 이천수의 프리킥으로 1대0으로 이겼지만, 솔직히 90분 내내 경기는 그리스가 지배했다. 그리스의 세트플레이는 '반(半) 골'이라 느낄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페널티 박스 좌우에서 중앙으로 올라오는 프리킥은 예리했고, 빠른 역습도 인상적이었다. 체격에서 밀리는 우리 선수들이 상대의 거친 압박에 힘겨워하는 모습을 벤치에서 지켜보면서 속이 쓰렸다.
선수로 뛰던 시절에도 유럽 팀은 늘 두려운 상대였다. 유럽 선수들은 골을 넣어야 할 순간에 반드시 성공시키는 것 같았다. 다리가 길어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며 패스가 바로 상대의 발에 걸렸다. 온몸이 돌덩이 같은 유럽 선수들과 몸싸움에서 우리가 밀린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 축구는 그동안 동유럽처럼 체격 조건이 좋은 팀에 고전할 때가 잦았다. 그리스 장신 선수들은 분명히 위협적인 존재다. FIFA(국제축구연맹) 세계랭킹(13위)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런 그리스팀이 최근 북한, 파라과이와 평가전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서 한국의 승리를 낙관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다. 언론 보도에 신경을 많이 쓰는 요즘 선수들은 이런 분위기를 잘 알고 있다. 이 때문에 그리스전을 앞둔 선수들이 오히려 심리적 압박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 역시 그랬다. 특히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는 엄청난 두려움과 외로움에 시달렸던 일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나는 2002년 전까지 월드컵에서 늘 비기거나 졌고, 이긴다는 느낌을 몰랐다. 게다가 월드컵 결과가 잘못됐을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심리적 부담감은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한국대표팀은 그리스를 뛰어넘을 기량과 정신력을 갖췄다. 그리스의 스피드는 우리가 상대해 본 동유럽 팀보다 뒤떨어진다. 대표팀은 이 점을 파고들어야 한다. 미드필드 진영의 박지성과 이청용, 스트라이커 박주영 등이 빠른 스피드로 상대 수비진을 흔들 수 있느냐가 그리스전 최대 관건이 될 것이다.
그리스전의 승부는 결국 선수들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느냐에 달렸다고 본다. 정신적 부담감을 얼마나 털어내느냐에 따라 실점을 할 수도, 득점을 할 수도 있다. 지금 대표팀 후배 중엔 2002년 4강 멤버가 있고, 2006년 독일월드컵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본 선수들도 있다. 이는 남아공월드컵에서 값진 자산이 될 것으로 믿고 싶다.
후배들이여, 월드컵은 아무나 설 수 있는 무대가 아니라는 말을 꼭 해주고 싶다. 태극마크를 달고 남아공에 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광스러운 일이다. 그 영광에 걸맞은 자신감으로 뛰면, 쉽지는 않겠지만 국민이 희망하는 결과가 나올 것이다. 남아공월드컵의 휘슬은 울렸다.
조선일보 / 2010. 6. 11 (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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