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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 페이퍼진] 잊을 수 없는 순간들 : 홍명보 '여학생이 보낸 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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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744회 작성일 18-10-1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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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포항에 입단하자마자 K-리그 MVP에 올랐다. J-리그 가시와 시절엔 주장 완장을 차고 팀 분위기를 한국식으로 바꿔 2000년 나비스코컵을 품었다. 그게 가시와 18년 역사에 유일한 타이틀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에선 브론즈볼을 안았다. 골잡이가 아닌 리베로였기에 더 빛나는 자취들이다. 작고 허약해 담임 선생님까지 운동을 말렸던 그는 90년 이탈리아대회를 시작으로 4회 연속 월드컵 무대를 누볐고, 특히 94년 미국대회에서는 2골-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이름을 드높였다. 펠레 선정 'FIFA 100인'에 포함된 사실도 그의 능력과 가치를 단적으로 설명해 준다. 한데 사람들은 그의 카리스마와 인간미에 그가 써 내려온 역사 못잖은 점수를 준다. 여러모로 매력적인 남자다.

  
'日에는 가지 마세요' 주홍글씨 팬레터에 경악
작은 체구 약점 극복위해 중2때부터 '정확하고 빠른 패스' 집중 연마


 1. 새벽에 등교한 이유

 꼬맹이 때 놀이라고는 축구밖에 없는 줄 알았다. 하루를 축구로 시작해 축구로 접었다. 등교하면 일단 축구부터 한 판 하고 교실에 들어갔다. 학교 파하면 제대로 판을 벌였다. 곧장 집으로 간 적이 거의 없다. 그러니 휴식시간이나 점심시간이야 굳이 들먹일 필요도 없다. 휴일이면 이웃 동네로 원정까지 다녔다. 그야말로 숨 쉴 틈만 나면 공을 찼다. 서울 광장초등학교에 다니던 같은 동네 10여 명의 또래 축구패가 그렇게 죽이 척척 맞았다.

 극성스럽게 공 차고 다닌 보람이 있었다. 4학년 때 축구부가 생긴 것이다. 축구에 죽고 살던 개구쟁이들에게 그보다 반가운 일은 없었다. 신바람이 나 다 함께 축구부에 들어가자고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벽에 부딪혀 덜렁 혼자 남겨졌다. 그러잖아도 공부 잘하는 2대 독자의 지나친 공놀이를 마뜩잖게 여기던 부모님이 운동부 얘기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어버린 것이다. 몸이 약하다는 점도 큰 이유가 됐다. 비록 동네축구였지만 잘한다는 소리깨나 듣던 터라 아쉬움이 컸다.

 멋있게 유니폼 차려입고 신나게 공 차는 친구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훈련하는 친구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과외공부 시간을 놓친 적도 있다. 그렇게 1년여 지난 5학년 말 축구부 코치가 손을 내밀었다. 주위를 맴돌며 애태우는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코치는 한 동네 아는 형이라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얼마나 축구를 좋아하고, 또 얼마나 재주가 있는지를. 그리고 그 좋은 축구를 왜 못하는지까지도. 코치는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을 설득했고,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 기어이 허락을 받아냈다.

 사실 축구에 빠져들게 한 건 아버지였다. 서울 구의동 토박이인 아버지는 축구를 잘해 동네 어른들 입에 오르내릴 정도였다. 코흘리개 시절 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준 것도 아버지였고, 서울운동장에 데리고 다니며 박스컵을 보여준 것도 아버지였다. 어쩌면 아버지가 코치에게 설득당해 준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에게 축구 맛을 들인 원죄를 가졌기에. "어릴 때라 누가 뛰었는지는 기억 안 납니다. 대신 서울운동장 관중석에 올라섰을 때 눈앞에 펼쳐진 파란 운동장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맨 처음 맡은 포지션은 레프트윙이었다. 출발은 늦었지만 빨랐고, 발재간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전체적인 운동이 힘에 부쳤다. 친구들과 하던 공놀이와는 달라도 크게 달랐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괴로울 때면 살짝살짝 후회도 됐지만, 그때마다 새롭게 어금니를 물었다. 부모님과의 약속, 그로 인한 책임감 때문에.

 학교까지는 걸어서 20여 분 걸렸다. 세계챔피언 홍수환이 로드워크하던 워커힐 옆길이 등굣길이었다. 학교는 주로 새벽에 갔다. 훈련은 따로 없었지만, 수업 들어가기 전에 개인기 연습하려고 달콤한 새벽잠을 포기한 것이다. 일찍 안 가면 공을 만질 수 없었던 고달픈 형편도 이유 중 하나였다. 축구 용품이라야 공이 전부인데 그 공이 턱없이 부족해 선수들이 새벽마다 쟁탈전을 벌여야 했다. 선수 20여 명에 공은 열 개 정도였고, 그나마 몇 개는 바람이 빠져 있었다. 그러니 실밥 안 풀린 탱탱한 공을 차지하려면 친구들보다 먼저 일어나야 했다. "새벽에는 주로 리프팅 같은 개인기 훈련을 많이 했어요. 친구들하고 경쟁하다 보니 실력이 늘어 한 번에 2000~3000개씩은 했죠."


 2. 야속한 몸뚱이

 광희중학교에 진학해 축구부에 합류하자마자 코치가 연습경기를 시켰다. 새내기들 기량을 점검하기 위한 일종의 테스트 게임이었다. 거기서 충격을 크게 받았다. 두드러지지는 않았어도 내심 잘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코치가 그 게임에서 제외한 것이다. 아예 평가 대상에도 끼지 못한 셈이다. 체구가 작다는 게 이유였다.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작은 건 사실이었다. 축구부에서 가장 작았고, 교실에 가도 맨 앞자리였다. 슬프고 참담한 심정으로 중학교 첫 경기를 그렇게 구경만 하고 말았다.

 "기술은 떨어지지 않았는데 체력이 달리니 경기에서 자꾸 빠지게 되더라고요. 코치 선생님은 '심하게 시키면 안 클까 봐 배려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는 않았죠."

 2학년이 되면서 위기가 닥쳤다. 번번이 발목을 잡던 왜소한 체격이 끝내 화를 불렀다. 연습경기 도중 상대에게 밀려 넘어지면서 오른쪽 쇄골이 부러진 것이다. 격한 충돌도 아니고 그냥 슬쩍 밀렸을 뿐인데 그 지경이 됐으니 누군들 몸집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반신에 깁스한 채 집에서 쉬고 있는데 담임 선생님이 찾아와 부모님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저렇게 약해서는 축구로 성공할 수 없으니 그만 시키자고. 성적이 상위권이니 지금 공부해도 안 늦다고.

 사실 부모님도 갈등이 심하던 시기였다. 작아도 기술이 좋아 반 게임씩은 뛰는 데도 주위 평가는 영 아니었던 것이다. 보는 이마다 그랬다. "공은 잘 차는데 몸이 약해서...." 그러던 차에 쇄골 부러지고, 선생님까지 반대하고 나서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래도 부모님은 그런 얘기들을 묵묵히 듣고 흘려버렸다. 모든 판단은 아들에게 맡긴 채 되레 식사와 보약에 더 신경을 썼다.

 깁스 풀고 팀에 복귀하면서 훈련 강도를 높였고, 정확하고 빠른 패스 위주로 훈련 패턴도 바꿨다. 부딪히면 나가떨어지니 드리블은 해 봐야 손해였다. 그래서 빠른 볼 처리가 필요했고, 빠른 만큼의 정확성이 또 필요했다. 정규 훈련만으로도 파김치라 개인훈련은 꿈도 못 꿨다. 훈련 끝나기 무섭게 가게로 달려가 우유 한 모금 마시는 게 더 급했다. 그 와중에도 2학년 때인 82년 제1회 KBS배 전국중고대회에서 팀이 4강에 오르는 데 힘을 보탰다.


대학 3년때 스위퍼 전환 진가 발휘…伊월드컵 태극마크 달아

  
 3. 인생을 뒤바꾼 포지션

 동북고 2학년 중반쯤 신체에 놀라운 변화가 일었다. 버스 손잡이에 머리가 닿기 시작한 것이다. 2학년 초반까지도 동북고 축구팀의 최단신이었다. 1m70에도 못 미쳤다. 바깥에 나가면 아무도 운동선수로 봐 주질 않았다. 버스 타면 야속하게도 손잡이가 머리 위에서 대롱거렸다. '저기까지만이라도...' 하다 보니 손잡이가 기준선이 되어 버렸다. 한데 그 손잡이가 정수리를 쓸기 시작한 것이다. 변화가 시작되자 손잡이는 순식간에 관자놀이까지 내려왔다. 불과 몇 달 사이에 1m79까지 컸다. 베스트 멤버로 기용된 것도 그때부터다. 갑자기 크다 보니 균형이 깨지고 스피드가 뚝 떨어지는 부작용이 따랐지만, 강한 체력훈련으로 되잡았다. 18년 만에 대통령금배를 찾아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고려대 3학년 때인 89년 일생일대의 모험이 시작됐다. 졸업한 임종헌의 빈자리를 메우라는 남대식 감독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임종헌은 최종 수비수 스위퍼였다. 중학교 때부터 줄곧 수비형 미드필더를 봤고, 득점왕은 못해도 대회 때마다 2~3골은 넣어 온 터라 수비수 얘기는 충격이었다. 게다가 드러나지도 않으면서 책임질 일만 많은 수비수에 대한 느낌도 별로였고. 그렇다고 감독 결정을 뒤엎을 방법은 없었다. 속을 끓이면서 적응하는 수밖에. 한데 그 한순간의 변화가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스위퍼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두각을 나타냈어요. 플레이 자체가 달랐거든요. 당시 최종 수비수는 공을 안전하게 뻥뻥 내지르는 게 주된 임무다시피 했는데 저는 패스와 드리블로 살려나가는 플레이를 했거든요. 어릴 때 열악한 신체 조건을 만회하기 위해 단련한 빠르고 정확한 패스가 바탕이 된 거죠. 그 바람에 대학 무대에서 이름 좀 날렸습니다."

 그해 말 어느 날 외출했던 어머니가 신문을 한 부 사 오셨다. 가판대에 놓인 신문에 아들 이름이 있어 반사적으로 집어든 것이다. '국가대표 후보에 오를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최종 결과는 그 예상을 뛰어넘었다. 90년 이탈리아월드컵 대표팀에 막내로 선발된 것이다. 학교 측으로 온 연락을 받고 이듬해 초 진해선수촌으로 내려갔다. 한데 당최 적응이 안 됐다. 공 차는 데는 아무 문제 없었으나 최순호 변병주 이태호 박경훈 김주성 같은 TV에서 보던 스타들과 생활한다는 게 쉽지가 않았다. 그 화려한 면면과 명성에 주눅이 든 것이다. 내성적이라 선배들에게 쉽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혼자 보냈다. 엄청난 압박감과 외로움에 학교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대학 무대에 이런 선수가 있다고 하니 이회택 감독님이 테스트 한번 해보려고 절 뽑은 게 아닌가 싶어요. 근데 조민국 선배가 다치는 바람에 월드컵 세 경기를 제가 다 뛰었어요. 아무 부담 없이 신나게 뛰었고, 좋은 평가도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국가대표 생활은 한국 축구의 희망이 됐고, 월드컵 4강이라는 자랑스러운 역사의 중심축이 됐다.


잊을 수 없는 두 경기

  
 1. K-리그 현대와의 2연전

 상무 제대와 함께 92년 포철에 입단했다. 90년 이탈리아월드컵에서 조별리그 3경기를 다 뛰어낸 최고의 수비수였기에 출발부터 주전으로 기용됐다. 리그 종반으로 가면서 순위 경쟁이 숨막히게 전개됐다. 포철은 현대와의 홈 2연전을 앞두고 있었고, 적어도 한 게임은 이겨야 선두 일화와 우승컵을 다퉈 볼 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첫 경기서 깨졌다. 두 번째 경기도 득점 없이 시간만 흘렀다. 종료 5분을 남기고 벤치에서 공격에 가담하라는 사인이 나왔다. 이회택 감독으로서도 방법이 없었다. 어차피 그 경기 비기면 모든 게 끝장이니 수비고, 포메이션이고 따질 형편이 아니었다. 집요하게 상대 골문을 공략하다 마침내 종료 직전 결정적인 기회를 잡았다. 왼쪽에서 날아온 볼을 가슴으로 트래핑한 후 멋진 왼발슛으로 연결했다. 한데 볼이 발에 닿는 순간 '아이쿠야' 싶었다. 발등에 제대로 얹혀 벼락같이 날아가야 하는데 축구화 끝에 간신히 걸려 바로 앞에 떨어진 것이다. 그래도 이길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맥없이 툭 떨어진 볼이 돌돌돌 굴러 골문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현대 선수들은 넋을 놓은 채 구경만 하고 있었다. 그 어설픈 골이 프로 데뷔골이자 그날의 결승골이었고, 결국 그해 우승의 디딤돌이 됐다. "그 볼이 발에 제대로 맞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 반대 상황이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아요." 애당초 신인왕 타이틀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런데 시즌 종료 후 떨어진 상은 MVP였다. K-리그 출범 10년 만에 신인이 MVP에 오르는 역사가 만들어진 것이다.


 2. 한-일 월드컵 승부차기

 2002년 한-일월드컵 때는 극도의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겉으로는 "자신 있다"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그럴 때마다 애간장은 고통스럽게 녹아내렸다. 앞서 출전한 3차례 월드컵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한 어두운 기억과 완장의 부담감이 숨통을 죄었고, 안방 잔치의 결과가 나쁠 경우 불어닥칠 후폭풍을 생각하면 아찔했다. 개성 강한 선수 품는 일, 후보로 밀린 선수 감싸는 일도 경기 못잖게 중요했다. 그게 팀워크의 기본이었기에.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걸 민감하게 듣고 해결해 주기도 하고, 따로 식사 자리를 만들어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도 했다. 어느 순간 그들도 태극마크 아래 하나로 녹아들었고, 개막을 앞두고 마침내 큰 하나가 됐다. 대한민국의 대폭발은 이미 거기서 시작됐다. 폴란드를 두들겨 사상 첫승을 장식하고, 강호 포르투갈을 제압하며 16강에 진출하고.... 제트기류에 올라앉은 대한민국의 기세는 섬뜩할 정도였다. 신바람 끝에 맞이한 게 8강전 스페인과의 승부차기. 살얼음판을 걷는 선수들 입장에서는 그런 불상사가 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아뜩합니다. 5명의 키커에 포함된 것도 힘들었고, 마지막 키커라는 사실도 힘들었어요." 황선홍과 박지성, 설기현이 차례로 골을 성공시켰고, 스코어는 3-3으로 팽팽하게 이어졌다."솔직히 마음속으로 '한 놈이라도 못 넣어라' 하고 빌었어요. 매도 같이 맞으면 낫다잖아요. 그런데 애들이 다 넣는 거예요. 그 짧은 순간에 이민 갈 생각까지 다 했다니까요. 저의 실축으로 진다면 어떻게 한국에서 살 수 있겠어요." 안정환이 네 번째 골을 성공시킨 후 스페인 호아킨의 슛이 이운재에게 막혔다. 4-3. 마지막 키커로 나선 홍명보는 후련한 라스트 골과 함께 죽음의 터널에서 빠져나왔다.


이런 일, 저런 일

  
 1. 우유에 밥 말아 먹기

 학창시절 화두는 오로지 몸뚱이였다. 스피드 괜찮고 기술 좋으니 신경 쓸 건 체격과 체력, 몸밖에 없었다. 하필 기술보다 체격과 스피드를 우선으로 꼽던 시절이었다. 기본기로는 어디 내놔도 자신 있었으나 신체 조건 때문에 좀체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라 좌절도 많이 했다. 고교 1학년 축구선수 키가 1m60 남짓이었으니 가슴을 칠만도 했다. 동북고에 들어가 합숙훈련을 하면서 우유에 밥을 말아 먹기 시작했다. 우유 마시면 키 큰다는 얘기를 믿어보기로 하고 내친김에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한 것이다. 남들은 웃을 일이지만 우유에 밥을 마는 심정은 처절했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한번 말아 보세요. 정말 맛없습니다. 그런데도 우유에다 밥을 마는 제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키 때문에 슬펐던 적이 많은 저로서는 클 수 있다면 더한 짓도 했을 겁니다."

 
 2. 교문에서 보약 마시기

 키만 작았으면 그나마 다행이었을 게다. 어쩌다 체력까지 약해 남들 다 하는 훈련이 그렇게 버거울 수가 없었다. 작은 데다 힘까지 달리니 상대와 부딪치면 사정없이 나가떨어졌다. 부모님도 안쓰러워 어릴 때부터 줄기차게 녹용을 달여 댔으나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고교 축구는 더욱 강한 체력과 스피드를 요구했다. 그래서 동북고에 들어간 후로는 보약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루에 두 번 어머니가 약을 갖고 학교에 오셨어요. 오전 훈련 끝나고 교문으로 달려가 하나 마시고, 오후 훈련 끝나고 또 마시고 그랬죠. 피곤하고 힘들어 귀찮기도 했지만, 어머니는 꼬박 2년을 그렇게 하셨어요." 고교 시절을 약기운으로 버텨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래서 2대 독자를 향한 부모님의 극단적 편애에도 입 한 번 내밀지 않은 두 여동생이 늘 고마웠다.

 
 3. 카타르와의 악연

 체구는 작아도 기술이 좋아 동북고에 들어가면서 16세 이하 청소년대표로 뽑혔다. 제1회 아시아청소년(U-16)선수권대회에 나갈 팀이었다. 난생 첫 해외 나들이가 하필 푹푹 찌는 중동의 카타르였다. 다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틈만 나면 호텔 수영장에 들어앉아 있었다. 컨디션 관리가 될 리 만무했다. 아니나 다를까. 홈팀 카타르와의 경기서 0대5로 나가떨어졌다. 어처구니없는 결과에도 놀랐지만, 카타르 선수들 얼굴 보고 더 놀랐다. 도저히 16세라고는 믿기지 않는 완전 아저씨들이었다. 확인할 길은 없었지만, 나이를 속인 게 분명했다. 93년 10월, 9년 만에 그 자리에 다시 섰다. 이번엔 94년 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이었다. "카타르와의 악연이 계속됐어요. 이번엔 일본한테 0대1로 졌죠. 막판에 이라크가 일본을 물고늘어지는 바람에 간신히 본선에 가긴 했지만요." 지금도 카타르 얘기만 나오면 아찔했던 두 가지 악몽 때문에 심장이 뜨끔거린다.

 
 4. 끔찍한 편지

 94년 미국월드컵을 마치고 귀국하자 J-리그 벨마레 히라츠카에서 입단 제의가 들어왔고, 그 사실이 보도되면서 팬들이 술렁거렸다. 16강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독일, 스페인 등 강호들을 상대로 2골-1어시스트의 눈부신 활약을 하고 돌아온 영웅 아니던가. 포항 숙소로 하루에도 팬레터가 50~60통씩 날아들 정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할 때였으니 그의 해외 진출은 이미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다. 한데 한국 최고의 스타에게 손길을 뻗친 무대가 하필 일본이라 팬들은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본에 대한 감정이 특히 안 좋을 때였다. 그즈음 포항 숙소에서 팬레터를 쌓아 놓고 읽다가 어느 한 편지를 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벌건 글씨로 '일본에는 절대 가지 마세요'라고 적혀 있었다. 여학생이 보낸 혈서였다. "섬뜩해서 바로 찢어버리고 그 길로 협상 중단시켰죠. 3년 후 벨마레로 이적할 때도 망설였습니다. 또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나 하고요."

스포츠조선 / 2010. 07. 15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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