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의 추억 [2] 홍명보의 1994 미국월드컵 독일전 추격골
"미국 월드컵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공항에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는 실감이 들었습니다. 자고 나니까 스타가 됐다고 할까요. 인생의 전환점이 된 골이었지요."
축구에서 수비수는 잘해야 본전이고, 실수하면 욕이나 먹는 자리라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었다. 한국 팬들의 이런 고정관념을 바꿔놓은 것이 1994년 미국 월드컵이다. 홍명보라는 수비수가 스페인전에서 1골, 독일전에서 1골을 넣고, 최고 스타로 탄생하면서 수비 포지션에 대한 인식 자체가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이기고도 망신당한 독일
미국 월드컵 C조에 속한 한국은 스페인과 2대2, 볼리비아와 0대0으로 비긴 상태에서 전 대회 우승팀 독일과 마지막 조예선 경기를 치렀다. 한국은 전반에만 클린스만에 2골을 내주는 등 0―3으로 뒤졌다. 누가 봐도 상대가 안 되는 경기였다. 홍명보 현 올림픽대표팀 감독은 "모두 체념하는 분위기였다. 만회골을 넣겠다는 생각보다 빨리 경기가 끝나기만 바랐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후반 7분 황선홍이 한 골을 터뜨리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날씨는 40도에 육박했고, 독일의 발이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홍명보는 동료 수비수에게 "내가 (공격으로) 올라갈 테니, 빈자리를 메워달라"고 말하고 공격에 적극 가담했다. 후반 18분 독일 선수가 걷어낸 공이 미드필드까지 진출해 있던 홍명보 발 앞에 떨어졌다. "앞에 마테우스가 다가오더군요. 다른 수비수도 없고 적당한 거리였어요. 직감적으로 슛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홍명보가 발사한 중거리포는 30m를 날아가 독일 골문에 꽂혔다. 이후 한국은 그로기 상태에 빠진 독일에 맹공을 퍼부었다. 홍 감독은 "야, 이젠 비길 수도 있고, 이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끝내 동점골이 터지지 않아 2대3으로 패했지만, 한국은 세계 축구의 자이언트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다. 한국이 월드컵에 남긴 명승부 중 하나였다. 홍 감독은 "후반엔 독일이 경기가 빨리 끝나기를 바랐을 것"이라고 했다.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홍 감독은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들이 쟁쟁한 다른 나라 스타 선수 때문에 괜히 주눅이 들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세계적인 강팀도 막상 경기장에서 부딪혀보면 의외로 해볼 만했고, 유명 스타들도 우리 생각처럼 완벽하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홍 감독은 "축구는 강한 팀이 늘 이기는 경기가 아니다. 실제 경기장에서 그런 점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고 했다. 결국 마음속의 공포가 가장 큰 적이라는 얘기다.
지금 대표팀에서는 조용형이 옛날 홍 감독이 맡았던 중앙 수비수로 뛰고 있다. 홍 감독은 조용형에 대해 "공격으로 나가는 패스가 좋고, 예측력이 빠른 선수"라고 칭찬했다. 중앙 수비수로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다는 평가다. 하지만 홍 감독은 "동료와 좀 더 많이 말하고, 적극적으로 지시하며 팀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원래 조용형은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중앙 수비수는 전체 팀도 조율해야 하며, 상대 공격을 막는 동시에 우리 공격의 시발점이 돼야 한다. 이런 역할을 위해선 적극적인 의사소통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홍 감독은 "동료와 적극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팀을 리드해 간다면 조용형은 더 좋은 수비수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김동석기자 / 2010. 04.23 (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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