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경기를 제외하면,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은 영 익숙하지가 않다.
특히 대관중 앞에서 빨간색 산타 복장을 입고 서는 일은 여전히 난감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대표팀에서 은퇴한 뒤 미국 프로축구 LA갤럭시에서 선수 생활을 할 때의 일이다. 뉴욕과 밤경기를 마치고 이튿날 오전 7시, 피곤한 몸을 이끌고 동료들과 함께 공항에서 비행기에 올랐다. 뉴욕에서 소속팀이 있는 LA까지는 이동하고 비행기를 타는 데 약 6시간이 걸린다. 무료한 시간이다. 뉴욕과 LA 사이에는 3시간의 시차가 있기 때문에 LA 공항에 내릴 때는 여전히 오전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이런 날 각자 알아서 휴식을 취했다. 잠을 잘 수도 있었고, 가족과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나도 한국에서는 그렇게 했다.
하지만 LA갤럭시는 달랐다. 비행기 트랩에서 내린 우리에겐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우리는 팀 지시에 따라 일부는 어린이들을 만나 팬 사인회를 열었고, 어떤 선수들은 지역 청소에 동원됐다. 나는 노숙자 재활 센터를 찾아 그들에게 공과 유니폼을 전달하고 시간을 보내는 역할을 맡았다. 원정경기를 마치고 오자마자 지역 봉사라니. 한국 프로팀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줄이었다. 그러나 LA갤럭시의 동료 선수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열심히 지역민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했다. 미국에서는 비인기종목 취급받는 축구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그들 나름의 헌신이었다.
미국 생활을 갓 시작한 때여서 말도 잘 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수 은퇴 후의 진로를 고민하던 나로서는 흰 종이에 그림이 그려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2002년 월드컵 때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성원을 받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너무 나 자신과 운동밖에 모르고 살았던 것 아닐까.
숙소와 운동장만 오가면서 아까운 시간을 불필요하게 보낸 날들이 허다했다. 밖에는 할 일이 너무나 많이 있었다. 대한민국 국가대표축구팀 주장으로서 월드컵에서 뛰는 영광도 맛봤고,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일종의 '채무감'을 느꼈는데, 빚을 갚을 길이 열렸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LA갤럭시 생활을 통해 축구 선수가 지역과 팬들을 위해 어떻게 봉사할 수 있는지 배운 것은 가장 큰 소득이었다.
마침 손에는 프로축구 포항을 떠날 때 구단으로부터 받은 5000만원의 전별금이 있었다. 한국에 돌아온 뒤 그 돈으로 장학재단이라는 걸 만들 생각을 했다. 이후 광고 출연으로 받은 돈도 재단에 넣었고, 각종 후원금도 넣었다. 지금은 금액이 17억원으로 늘었다.
내 이름을 딴 장학금을 받은 선수들이 지금은 현역으로 뛴다. FC서울의 이상협, 강원FC의 권순형은 프로에서 활약 중이고, 올해 20세 이하 청소년 월드컵에서 맹활약했던 김민우도 한국 축구의 재목으로 성장했다. 그들만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느낌이다. 이전처럼 축구 선수로만 살았다면 절대로 느낄 수 없는 보람이었다.
장학재단과 각종 기부 사업의 가장 큰 후원자는 미국에서 성장한 아내(조수미)였다. UCLA에서 유아교육학을 전공했던 아내는 운동만 했던 나보다 시야가 훨씬 넓었다. "선수 끝난 뒤에는 코치 말고 다른 일도 해 보세요. 세상에는 많은 가능성이 있고, 어려워도 도전할 만한 일, 명분 있는 일들이 있잖아요. 운동장에서 할 수 없는 일을 해 보세요." 2002년에 장학재단 이사장을 내가 직접 맡게 된 것도 "이름만 걸어놓지 말고 직접 뛰고, 결정하고, 운영하면서 세상을 배우라"는 아내의 권유 때문이었다.
2003년부터는 매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에 자선축구경기를 열고 있다. 올해로 벌써 7년째가 된다. 2007년부터는 번듯한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행사를 열게 될 만큼 성장한 것이 큰 보람이다. 다만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는 입장에서 행여 나의 출전 부탁이 선수들에게 압력이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그래서 유럽처럼 먼 곳에서 뛰는 선수들에게는 출전을 부탁하지 않는 원칙을 지켜나가고 있다. 그러나 요맘때가 되면 "올해는 자선경기에 나 안 불러요?" 하고 먼저 전화를 해주는 후배 선수들도 있다. 그들은 가장 고마운 행사의 후원자들이다.
지금까지 선수로, 코치로, 감독으로 경기장에 서 살아 왔고, 수만명 관중 앞에서 경기할 때 한번도 위축된 일이 없다. 그러나 나는 연예인이 아니며 성격도 내성적인 쪽이다.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아내와 첫 부부싸움을 하게 된 것도 "당신은 왜 그렇게 말이 없느냐"는 이유였으니까.
축구 경기를 제외하면, 남들 앞에 나서는 일은 영 익숙하지가 않다. 특히 대관중 앞에서 빨간색 산타 복장을 입고 서는 일은 여전히 난감하다. 한번은 행사 진행자에게 "산타 복장은 좀 봐주면 안 되겠느냐"고 부탁한 일도 있지만 "이러시면 곤란하다"고 해서 결국 입고 말았다.
올해도 크리스마스인 25일이 되고, 서울월드컵 경기장에서 자선 경기가 열릴 때 나는 다시 산타 복장을 꺼내 입을 것이다. 나와 내 동료 선후배들이 산타 복장을 해 마음의 위안을 받는 어린이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뒤늦게나마 나누는 기쁨을 배우게 된 것은 인생 최고의 축복이었다.
조선일보 / 2009. 12. 17 (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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